가수 박재란이 두 번의 이혼을 겪은 아픔을 뿐만 아니라 기구한 인생사를 고백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어요. 지난 9일 방송에서나온 KBS1 프로그램 "아침마당"속 코너 "화요초대석"에는 가수 박재란이 게스트로 출연했네요


경쾌한 멜로디의 목소리와 이국적인 외모로 어려웠던 60~70년대 힘들었던 온국민들에게 따뜻한 감성을 주는 박재란씨였습니다.


박재란은 유년시절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할정도로 허약한 편이어서 7살때 '뇌염'으로 사망진단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행이 기적적으로 살아날수 있었지만 6.25 전쟁중이었던 부친을 박재란 나이 10살이 되던해 잃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철도국 직원이셨다고 합니다.


박재란은 작곡가 김광수씨의 집에 갔다가 전남편 박운양씨와 첫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전남편 박운영은 영화제작일을 하다가 사기를 당하게 되면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100평 남짓 2층 집도 팔게 되고 전셋집으로 이사를 갈만큼 경제적으로 힘들어졌고 두사람의 사이도 안좋아졌습니다. 결국 두사람은 여러가지 불화를 시작으로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여배우에게 이혼은 "당시 여자가 이혼하는 것은 죽은 생명이나 다름없었다"라고 생각할만큼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이혼했을까'라는 말로 대신하는 박재란은 첫번째 결혼 실패후 힘든 시간들을 견뎌왔습니다.


첫 번째 결혼 실패 후 두 딸들과 헤어졌다는 그는 "미국으로 이주를 했어요. 한인 사회에서 노래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행사가 많았습니다 그때 당시 행사비가 우리나라 돈으로 최소 1000만원 정도였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두 번, 세 번 사기를 당했어요. 세상을 잘 몰라 사람을 잘 믿었습니다 다 진심이라고 생각했다가 큰 실패를 겪었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또한 "영주권이 없어 불법체류를 하면서 험난하게 살았습니다 추방당할 위기였습니다 이와같은 한계가 있었고 결국에는 유치장까지 갔다"고 고백했어요.

 

미국에서 마음의 병을 얻은 박재란은 악성위궤양과 신장염으로 쓰러지기도 하고 부정맥으로 대수술도 2번이나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에 미국행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낙원인줄 알았다. 하지만 불법체류 신세가 됐다. 재혼을 해 영주권을 얻었지만 불행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두번째 이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몇번씩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바닷가에 나갔습니다 신발까지 벗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대로 죽으면 가족과 딸들을 어쩌나 싶었고, 다시 일어나 보자고 마음먹었다"고 그때 당시를 회상했어요.


박재란의 둘째 딸은 7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는 이를 밝히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와 같이 둘째 딸인 가수 박성신의 활동 영상이 공개되자 귀까지 틀어 막았습니다


하지만 박재란은 "대전에서 사위에게 전화가 왔던 상황이다. 갑자기 쓰러져서 사망했다고 하더라. 장례식장에 있던 딸의 영정사진 앞에서 기절을 했다"라고 박성신 사망 비보를 접했던 당시를 떠올렸답니다. 박재란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난 후였던 것이다. 사위가 (내 상태를 알고) 딸의 묘지를 안 알려줬던 상황이다. 딸의 마지막 순간을 하지 못했다"라며 눈물을 보였답니다.

 "다 내가 나빠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딸들 마저 오해를 하더라. 가수 현미씨가 도움을 줬습니다. 나는 미국에 있다 보니 현미가 딸들에게 내 상황을 다 전해서 오해를 풀어줬습니다"며 고마워 했어요.

고 박성신씨는 박재란의 음악적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아 1987년 대학가요제를 수상하며 가수로 데뷔하였습니다.

박성신씨는 '한번만 더'라는 대표곡이 있는데요. 핑클, 마야, 이승기 등의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 한 곡으로도 유명합니다.


박재란씨의 , 1938년생 올해 나이 83세로 본명은 이영숙입니다. 서울 경성 출신으로 1남 5녀중 4녀로 태어났습니다.

'산 너머 남촌에는', '코스모스 사랑', '러키 모닝'등의 대히트곡을 남겼습니다.

1959년 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에서 첫 출연하면서 영화 배우로도 활동한 배우이기도 하죠.